초등학생 시절, 5⋅18에 대해 집안 어른들에게 물어보라는 숙제를 받았던 적이 있다.
엄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면서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당시 엄마는 계림동에 사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소풍을 가려고 김밥을 싸 두어서 집에서 먹었다고 했다. 고시 공부를 하던 엄마의 삼촌은 나주로 가는 배 트럭에 숨어 도망을 갔고, 창마다 이불을 붙였으며, 외할머니가 주먹밥을 만든 이야기도 묘사해 주었다. 당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했다던 외할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도둑이 든 적도 있었다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내가 군부가 그랬냐고 물으니 엄마는 “그랬겄냐? 시민군이겠지!” 라고 답했다. 흑백논리에 빠져 있던 초등학생에게는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웠다. 시민군이 나쁜 행동을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당시 내게는 애도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엔 죽은 사람도 없었고, 시위하러 나간 멋진 사람도 없었고, 도둑의 진실은 숨겨야 할 것 같았다. 5⋅18에는 한 건의 도둑질도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게는 은연중에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쥐어져 있던 셈이다.
나에게 반론해본다. 일상을 살던 사람도 공포에 떨고 죽음의 위기를 느껴야만 했던 사건이 5⋅18이다. 또, 정말 도둑질이 없었을까? 있었더래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고 양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우리 할머니가 신고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게 대동세상 아닌가요?
하지만 스스로 반론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우선 소외의 경험이 필요했다.
광주 바깥에 있으면 끊임없이 알게 된다
지금은 5⋅18 얘기를 하고 있을 만큼 이 이슈에 관심이 있지만, 10대 시절의 나는 광주를 정말이지 지독하게 싫어했다. 광주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수도권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생각밖에 안 했다.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1. 문화예술적으로 낙후되었다.
2. 직업조차 얻기 어렵다. (그 이유로 어른들은 공무원이 되라고 한다. 지겨워 죽겠다.)
3.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민주주의에 기여했다고 믿고 있어서 자기들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모른다!
얼마나 꼭 떠나야 하는 이유인가? 그러나 당연하게도 떠난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다.
타지 생활은 도리어 내가 얼마나 광주 사람인지 깨닫게 하는 일이었다. 콩국수에 설탕 좀 넣어 먹었다고 하루 종일 놀림 받는다거나, 광주 애들로 묶음 취급당하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사회운동을 하던 친구 중 하나가, 5월 18일이 자기 생일이라며 자기는 빨갱이 날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머리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앞에서는 화내는 것 말고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이지 바보 천치였다.
그 얘기를 들은 엄마는 잘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