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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ORA - 오픈마이크
수다쟁이 요청
2024년 9월 23일
글  이가현

우리, 준비 된 걸까?

5⋅18을 둘러싼 요즘의 화두 중 하나는 어떻게 5⋅18을 당사자 이후 세대, 특히 청년 세대에게 계승하냐의 문제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이제 증인들이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 힘 빠지는 소리 하나 하자면 … 나는 광주 청년 전반의 의식에 5⋅18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웹진을 읽고 있는 사람은 관심이 많은 편일 것이고, 당신이 계승의 희망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대중’ 청년이 관심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또, 관심 있다고 해서 잘 아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잘 모른다.

​게다가 통칭 ‘5·18 세대’ 라고 불리는 어른들의 종류는 거칠게 나눠보면 두 가지. 청년들이 하는 일을 응원해 주거나 우리의 MZ력에 놀라신다. 솔직히 난 응원 받고 싶다. 예쁨 받고, 우리 집 며느리 하면 좋겠다는 소리 듣고 싶다 ……. 내가 좋아하는 어른들은 그런 말 잘 안 하지만 …….

​몇 달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어쩌다 청년층의 5⋅18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동료 직원 중 하나가 자기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고 답했다. 무언가 지으려고 하면 5⋅18 단체 등 시민단체에서 반대해대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대부분의 반응이 그와 같았다. 광주가 노잼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개발을 막는 시민사회단체들 때문이라는 말, 광주에는 5⋅18 단체를 필두로 한 시민사회단체 목소리가 세다는 의견. 5⋅18 이야기가 피로하고, 그만했으면 한다는 것.

​어느 날 구도청을 지나는 택시에 탔을 때 들었던 기사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우리도 이제 발전하기 위해 다 잊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친구가 죽는 것을 본 목격자였으며, 그때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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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잼도시 광주입니다
 
우리의 도시에는 아쉽게도 좋은 일자리가 없고, 삶을 배울만한 선배나 마음 나눌만한 친구가 드물며, 팍팍한 일상을 견디게 해줄 만한 무언가도 없다. 다른 지역처럼 관광도시인 것도 아니고, 특출난 명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남지역 인구를 빨아들여 수도권으로 내보내고 있는 전형적인 ‘지방’ 광역시. 거주민에게도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잼도시’라는 오명도 뒤집어쓰고 있다. 그 와중에 호남 차별까지 당하니 정말 광주 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호남 차별 문제는 꽤 오래된 문제로, 1960년대에는 ‘전남푸대접시정대책위원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지금과 비슷하다. 사업이 자꾸만 취소되거나 예산이 삭감되었다.1)

​그러니 그 심정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겠다. 호남인들에게 5⋅18은 국가 폭력뿐 아니라 호남 차별의 경험이기도 했다. 광주는 고립되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다. 광주뿐 아니라 담양이나 해남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걸 모두가 몇 년 동안 말하지 못했다. 

​호남 소외감은 5⋅18 이후 재앙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5⋅18 이라는 집단적 PTSD가 주었을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본다. 체념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 동시에 삶을 끝낼 수는 없었던 사람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기도 했던 사람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특정 정당에 대한 불신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 시간이 지나며 어떤 이들은 그때를 지나갔고, 어떤 이들은 지나가지 못했다.

[각주]
1) 이런 난항에 비해 건물은 우후죽순 난개발이다. 광주도시계획위원회는 2019년부터 2년간 단 한 번도 부결을 낸 적 없었다. 아파트 등 온갖 건물을 지어 올리는 것이 전부 허용되었다는 뜻이다. 2023년부터 회의를 공개하기로 한 이후에도 다른 지자체처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2021년 학동에서, 화정동에서 아파트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을까? 회의가 공개됐을까?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도 부결의 기록이 이어지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미처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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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억
초등학생 시절, 5⋅18에 대해 집안 어른들에게 물어보라는 숙제를 받았던 적이 있다.
엄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면서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당시 엄마는 계림동에 사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소풍을 가려고 김밥을 싸 두어서 집에서 먹었다고 했다. 고시 공부를 하던 엄마의 삼촌은 나주로 가는 배 트럭에 숨어 도망을 갔고, 창마다 이불을 붙였으며, 외할머니가 주먹밥을 만든 이야기도 묘사해 주었다. 당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했다던 외할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도둑이 든 적도 있었다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내가 군부가 그랬냐고 물으니 엄마는 “그랬겄냐? 시민군이겠지!” 라고 답했다. 흑백논리에 빠져 있던 초등학생에게는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웠다. 시민군이 나쁜 행동을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당시 내게는 애도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엔 죽은 사람도 없었고, 시위하러 나간 멋진 사람도 없었고, 도둑의 진실은 숨겨야 할 것 같았다. 5⋅18에는 한 건의 도둑질도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게는 은연중에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쥐어져 있던 셈이다.

나에게 반론해본다. 일상을 살던 사람도 공포에 떨고 죽음의 위기를 느껴야만 했던 사건이 5⋅18이다. 또, 정말 도둑질이 없었을까? 있었더래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고 양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우리 할머니가 신고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게 대동세상 아닌가요?

하지만 스스로 반론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우선 소외의 경험이 필요했다.
 

광주 바깥에 있으면 끊임없이 알게 된다

지금은 5⋅18 얘기를 하고 있을 만큼 이 이슈에 관심이 있지만, 10대 시절의 나는 광주를 정말이지 지독하게 싫어했다. 광주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수도권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생각밖에 안 했다.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1. 문화예술적으로 낙후되었다.
2. 직업조차 얻기 어렵다. (그 이유로 어른들은 공무원이 되라고 한다. 지겨워 죽겠다.)
3.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민주주의에 기여했다고 믿고 있어서 자기들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모른다!
 
얼마나 꼭 떠나야 하는 이유인가? 그러나 당연하게도 떠난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다.
타지 생활은 도리어 내가 얼마나 광주 사람인지 깨닫게 하는 일이었다. 콩국수에 설탕 좀 넣어 먹었다고 하루 종일 놀림 받는다거나, 광주 애들로 묶음 취급당하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사회운동을 하던 친구 중 하나가, 5월 18일이 자기 생일이라며 자기는 빨갱이 날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머리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앞에서는 화내는 것 말고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이지 바보 천치였다. 

그 얘기를 들은 엄마는 잘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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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자란다는 것
 
잘 모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배울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광주로 다시 내려와 만난 친구가 5⋅18 캠프를 하고 있었다. 코로나 시기였던지라 그 애는 온라인으로 해설을 하는 영상을 업로드하고 싶어 했고, 내게 촬영을 도와달라고 했다. 말이 도움이었고 놀러 다녔지만, 덕분에 온갖 사적지에 다 가볼 수 있었다. 광주 천지가 사적지였다. 

​그러고 나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80년대의 해태 타이거즈는, 5⋅18을 말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뭉칠 수 있던 계기라고 했다. 극단 토박이는 5⋅18 열사인 박효선이 만든 거였고, 시내 멀지 않은 곳에는 적십자병원이 여전히 먼지 구덩이에 쌓여 있었다.

​잊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5⋅18 직후의 사람들은 비밀스럽게 추모해야 했다.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망월묘역에 몰래 들어가 비석을 탁본을 뜬 후, 묘역을 재현했다는 사진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나니 많은 것들을 가늠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애도할 때에는, 우리가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를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마음속에 난 구멍을 도저히 메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를 보고 그 날을, 그 사람을, 혹은 그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며 그것이 있었다는 것을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탁본을 떠서라도.

그러고 보니 도시 전체가 5⋅18의 기억이었다. 단지 오래된 건물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배웠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광주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광주를 사랑하게 된 것은 결국 5⋅18 때문이었다. 단순히 보도블럭 하나하나마다 오월의 기억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도시가 계속해서 나를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기른 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월을 알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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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계속되길
 
택시를 타고 민주광장을 지나다 보면, 간혹 5⋅18을 말하는 기사님들이 있다. 자신의 오월은 어땠는지, 어떤 오월을 바라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 같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나의 또래 세대들이 그런 수다쟁이가 되어주면 좋겠다. 광주가 당신을 어떻게 길렀는지, 오월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듣고 싶다.

​도시를 가꾸어 가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광주 사람들에게 질문하기를 요청한다. 무슨 오월을 갖고 있냐고, 광주가 당신을 어떻게 키웠느냐고. 그때 사람들이 내뱉을 대답과 진심이 담길 광주를 기대한다. 이야기는 도처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하철 행운의 자리에, 때로는 길가의 풀숲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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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가현
사진 @wung_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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