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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한 번쯤 미끄러지더라도
누군가의 시도는 언제나 의미가 있으니까
2024년 8월 26일
광주의 오월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어떤 시도들을 할 때, 미끄러지더라도 절대 "아 망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셨던 민영님. 결국에는 누군가의 그런 시도들이 모여 지금까지 오월을 기억했을 것이란 그 말이 참 기억에 남았는데요. 문화예술 기획자인 신민영님의 에.메.올팀이 만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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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반갑습니다. 현재 하시는 일과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민영님: 안녕하세요. 문화예술분야에서 여러 일을 하고 있는 신민영입니다. 저는 대학때 기획 동아리 활동을 통해 ‘기획’이라는 것에 발을 담갔고, 지금은 ‘기획’을 일로 하고 있으며, 현재는 광주 궁동 예술의거리에서 < 2024 아시아 문화예술 활성화 거점 프로그램-예술의거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에디터: ‘광주 ART 공항’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주요하게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함께 소개해 주세요!

민영님: ‘광주 art 공항’은 예술의거리에서 계속 진행되온 아시아문화예술 활성화 거점 프로그램의 2024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올해는 (사)한국미술협회광주광역시지회와 와사달이 진행을 하고, 공항이 가지고있는 허브라는 역할을 접목시켜 궁동 예술의거리를 예술 허브로 만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 ‘광주 art 공항’ 예술의거리 사업단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예술과 함께 어우러지는 거리로 만들고자 예술가 지원사업인 < 활주로-37(레지던시 운영) >, < 출국(아트페어 지원사업) > 상생 프로그램인 < 개미놀장(플리마켓) >, < 샵인샵(예술가x상인 매칭 프로그램) > 등 정말 많은 프로그램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덧붙여서 시민분들도 참여가능한 전시, 강연,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중입니다. 저희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홈페이지에서 사업 내용 확인 가능하니까 꼭...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에디터: 문화예술 기획자로 여러 행사와 프로그램을 진행했을텐데요. 어떤 계기로 '기획자'로서 활동하게 됐나요?

민영님: 사실 아직까지 스스로를 "기획자"라고 입밖으로 꺼내본적이 없어서 낯간지럽지만 제가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도 있고, 여러 기획에 참여 했으니 기획자가 맞겠죠? 기획을 처음 하게 된 계기는 대학교 4학년때 "기획 동아리"라는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였어요. 2학년때였나 < 취업 페스티벌 >이라는 행사가 학교에서 열렸어요. 대외활동 알려주는 부스도 있고, 강연도 하더라구요. 저는 당연히 학교에서 만든 사업이라 생각했어요. 근데 기획 동아리에서 학생들이 직접 학교에 제안한 일이더라고요. 강당을 대관하고, 여러 활동가를 섭외하고, 학교에 협력을 제안했어요. 그때 '어떻게 학생들이 이런 걸 만들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해봐야 겠다 했죠.

그리고 4학년이 되어서 동아리에 들어갔어요.(취업준비 안했나..?) 아무튼 들어가서 진짜 재학생 대상으로 멘토링 프로그램, 역사 문화 투어 프로그램, 취업페스티벌을 기획했어요. 저는 걱정과 겁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늦은 시간까지 아이디어 회의도 하고, 발로 뛰면서 협찬받고 홍보했던 경험들이 '시도부터 해보자'하는 마음을 만들어 줬어요. 그리고 잠시 방황과 취준의 눈물을 흘리다가 축제를 기획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고, 잊고 있던 도파민이 터지면서, 다시 기획의 늪에 빠져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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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전부터 하시는 일을 보면 예술가와 대중이 어울리길 바라는 일들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기획한 것들 중에 기억에 남는 행사나 프로그램이 있나요??

민영님: 제가 참여한 프로젝트 중에 < 거리극 축제 >가 있었어요. 각 국의 거리극을 하는 예술가들을 초청해서 민주광장과 금남로를 다 무대로 사용하는 축제였어요. 준비하고 진행하는 내내 이런 기획을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고, 배워가는게 많은 프로젝트였죠. 당시 축제를 기획하셨던 임수택 감독님께서 어느날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없앰으로, 심리적 경계도 없앤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말 그대로 경계가 없으니 보는 사람도 더 공연에 몰입하며 관람하고, 예술가들은 섬세한 동작과 감정을 그대로 전달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거든요. 지금 그때에 다시 젖어들었네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대중과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장면들이 펼쳐졌던 그때가 가장 꿈같았고 기억에 남아요.


에디터: 그럼 오월 콘텐츠로서 기억에 남는 작품도 있나요?

민영님: 예전에 임을 위한 행진곡 뮤지컬 제작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때마침 그 사업 전에 제가 한강 작가의 < 소년이 온다 >라는 책을 읽었는데, 책 내용 중에서 80년 5월로 희생된 한 영혼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봤을 때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지더라고요. 읽는내내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걸 보면서 또 한번 광주의 5월에 깊게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프로젝트 당시로 돌아가서 그때 뮤지컬 기획을 위해서 < 휴먼 푸가 >라는 연극을 볼 기회가 생겼어요. 그게 < 소년이 온다 >라는 책을 원작으로 두고 한 연극이거든요. 근데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연극이 아니고 행위 예술과 비슷한 개념에 작품으로 독특한 연출의 연극이었어요. 이때 연극을 보면서 < 소년이온다 > 내용들이 다시 떠올랐고, 특히 희생된 영혼의 시점을 연기하는 부분에서 정말 눈물이 나는 연출이었던게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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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에디터: 저도 오월을 공부하기 위해 < 소년이 온다 >을 읽어보려 했는데 너무 슬퍼질까봐 못 읽게더라고요. 민영씨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5·18에 관심이 있었나요?

민영님: 광주, 전남에서 학교를 다니면 자연스럽게 체험학습이나 소풍으로 망월동묘역 같은 사적지를 가잖아요. 저도 처음엔 교육으로 오월을 접했어요. 근데 관심이 생기게 된 계기는 부모님 이야기를 듣고난 후 였구요. 부모님은 어릴 때 이야기 하시는 걸 정말 좋아하셨어요. 두 분 다 광주 토박이셨고 학교생활에서부터 두분이 겹치는 이야기들이 있어 그런지 함께 이야기 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1980년 5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어요. 차곡차곡 쌓아온 이야기부터, 당시 배경과 묘사를 자세하게 해주셔서 더 생생하고 계속 듣고 싶었어요. 사실 오월 이야기 대부분은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대다수라 어린 나이엔 잔인하고 무서운 묘사들이 많았어요. 반면에 부모님이 겪은 이야기에서는 부드럽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그정도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1980년 여러 일들이 일어나면서 하교할땐 외할아버지께서 자전거로 태우러 오셨다고 해요. 뭐가 그리 급하신지 어머니를 태우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빠르게 집으로 달려가셨다고. 그런데 학교에서 갑자기 나오지 말라는 통보가 내려졌고, 이후 다시 등교를 하게 됐지만 반 친구들 몇명이 자리에 없어서 굉장히 불안하고 무서웠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아버지는 형제들과 건물 옥상에서 시위대 구경하다가 걱정하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발견돼 잡혀 내려온 적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이런 부모님이 경험한 이야기가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셨겠지만 어린 저에게는 늘 하시는 이야기의 연장선이었고 그래서 오월에 다가가기 쉬웠던 기억이었다고 생각해요.


에디터: 많은 분들과 오월을 이야기하면서 5·18을 어떻게 해야 접근하게 쉽게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을 나눴어요. 기획자로서 어떤 방식으로 오월을 가깝게 만들 수 있을까요?

민영님: 초등학생때 5·18에 대한 만화책이나 소설이 학교에 몇 권씩 꽂혀 있었어요. 어린 아이들에게 맞춰진 만화는 특히나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전개되었고, 제게는 그게 부모님의 이야기 이후에 쉬운 접근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정말 현실을 바라보려면 시청각 관련 자료들이 주는 영향력이 더 크겠지만, 단계를 밟아가면서 알려주는 게 지금 생각해도 맞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거부감이 생기는 건 너무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사실로만 사람들에게 전달해서 그렇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요. 물론 크나큰 희생과 아픔을 멋대로 쉽게 전달해서도 안 되지만 처음 접하는 누군가에게는 이 사실의 역사가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지금의 우리 비경험세대들도 마찬가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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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실 인터뷰로 가장 듣고 싶은 질문 하나가 있다면, 지난 5월에 열린 조선대에서 축제가 열린 것을 알고 계시죠? 한 명의 기획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민영님: 저는 대학을 광주에서 나오지 않아서 사실 5월에 대학 축제를 하지 않았다는 걸 몰랐어요. 근데 주변 광주 지역 학교를 나오신 분들은 5월에 축제를 하는건 아직은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오월이라는 의미가 묻혀버리는 것 같다구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축제는 이미 했고 앞으로도 하게 될텐데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단순하게 든 생각은 물 흘러가듯 진행되는 축제가 아닌, 오월을 되새길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실천하면 어떨까 싶어요. 

물론 조언을 구하는 일이나 다른 방법을 고안했던 것 같은데 그만큼 그것만으로는 오월의 의미를 보여주기에는 아쉬웠던 거죠. 어려워요. 그래서 더더욱 고민을 쌓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주변에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분들이 계시는데 이 분들의 이야기를 돌이켜 보면 슬플 때 충분히 슬픔을 토해내야 슬픔과 그리움을 견뎌낼 수 있다고 했어요. 80년 오월도 내 자식, 부모, 친구가 어느날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죽음을 당하고,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슬픔을 겪은 거잖아요. 저는 지금 광주의 오월의 슬픔과 그날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장치를 만든다면 축제는 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아니요. 그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아직은 그 날의 아픔을 치유하는 기간이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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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통해 하시고 싶은 말이 있나요?

민영님: 기획업무를 하다보면 당연히 ‘아 망했다’ 싶을 때가 정말 많아요. 그럴땐 ‘부디 이 일이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 생각하면 끝까지 하게 돼요. 망했다고 해서 놔버리면 시도조차 한적이 없게 되니까 발판으로조차 쓸 수가 없잖아요. 전 지금 광주의 오월을 기억하려는 여러 사람들의 시도들이 미끄러지더라도 절대 ‘아 망했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 한번이라도 그 시도를 통해 오월을 기억했을테니까. 그리고 그 기억으로 또 새로운 시도들이 생겨날테니까 그럴땐 우리 모두 발판이 되기를 바라며 끝까지 해나가길 바라요. 그렇게 해나가면 1980년 5월 광주 사람들이 그날을 당연히 기억하듯 우리도 그날을 당연히 우리의 기억속에 떠올리는 날들이 올거라고 믿습니다.
(마침)


인터뷰 진행일: 2024년 8월 19일
에디터: 에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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