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텍스트로서의 5·18"
문학과 지성사에서 2020년 출판된 도서 < 무한텍스트로서의 5·18 >(김형중, 이광호 엮음)에서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5·18은 국가권력과 인간의 조건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드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강렬한 사건으로 그 의미와 작업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지난 40년간 5·18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이 있었고, 그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 드러내야 할 사실의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5·18은 이제 사실의 영역을 넘어 고유하고 개별적인 '진실'의 영역에 진입하고 있다. (중략) 우리가 5·18을 '무한텍스트'라고 명명하는 것 역시, 5·18이 하나의 이름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히 열린'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5·18을 둘러싼 완전하고 올바른 역사는 없으며, 5·18에 대한 새로운 언어들이 끊임없이 발명되어야 한다."1)
"인정하는 것이 시작인 것 같다"
5·18을 주제로 한 더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인정'이 첫 시작인 것 같다. 하나마나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5·18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 때 '완전하고 올바른 역사를 모두 영화에 담아낼 순 없을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것부터가 오월의 무한텍스트를 쓸 수 있는 첫 시작이라고 생각된다. 당연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의무감, 사명감, 잘 만들어야 된다는 부담감, '사실을 완벽하게 담아내면서', '재미도 있어야 하고', '의미까지 잘 담아야 한다는' 목표들이 사실은 깨져야 된다. 이게 깨져야 영화든 글이든 무한의 가능성으로 갈 수 있다.
"새롭기 위해, 크고 넓게 보는 시선이 필요"
무한텍스트를 계속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은 좌우의 시선이나 찬반을 논하는 시선은 아니다. 5·18 안에서도 다양한 시선과 키워드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좁게 생각하기보다 앞으로는 좀 더 큰 카테고리들로 접근해 보면 좋겠다. 그럼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 5·18 광주영화로 나아갈 수 있겠다 싶다. 돌이켜보니 5·18 영화를 보지 않았던 이유가 떠올랐다. 영화 한 편으로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무한텍스트로서 새로운 시선과 콘텐츠가 생겨난다면 발걸음을 가벼이 영화관으로 돌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구성"
이번 광주독립영화제에서 < 디데이 프라이데이 >라는 단편 영화가 있었다. 내용은 84년 광주에서 고등학교 야구선수를 좋아하는 여학생의 이야기로, 고교 야구대회를 보러 가고 싶은데 그날이 하필 5·18 때 돌아가신 이모부의 제삿날이라 못 가게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5·18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신 이이다 감독님은 97년생이신데 첫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을 다룬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여러 현대사 중에 5·18을 선택하셨다고 한다. 광주와 어떤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앞으로는 오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광주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역사를 알리고, 혹은 어떤 부채감을 씻어내는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는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소재로서 선택되는 시대가 점점 오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오월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것에 정답 공식은 없다고 생각한다. 5·18 잘 알아야 되거나, 광주와 연이 있어야 광주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틀을 깨부수어야 결국은 더 좋은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한편으로 쏠리지 않은 관점으로"
모양이 뾰족한 것도 있고, 둥그런 것도 있고, 네모난 것, 독한 냄새가 나는 것 등등 사람도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한데 매번 비슷해 보이면 새로운 게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양한 것에서 새로운 대화와 영감이 생겨나지 뾰족한 것만 향해 간다면 뾰족한 걸 싫어하는 사람만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한텍스트로서의 오월 영화에는 다양한 제작과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한한 재해석에도 경계는 필요하다"
다만 무한텍스트로서의 오월이 결코 왜곡과 폄훼를 만드는 세력들에게 어떤 단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재해석만큼이나 사실로서의 역사를 지켜나가고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경계를 지혜롭게 잘 지켜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