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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충분히 헤매는 사람, 
광주를 기린아(麒麟兒)를 꿈꾸다
2024년 8월 12일
하고 싶은 일도, 재능도 많은 기린아(麒麟兒)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 충분히 헤매고 넘어져 온 사람, 용기 있는 선화님을 에.메.올팀이 만나고 왔습니다. 선화님은 "기린"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데요. 광주의 기린아를 꿈꾸는 선화님과 함께 광주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해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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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선화님 안녕하세요! : ) 반가워요! 자기소개를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선화님: 세상에서 자기소개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하하...🙂‍↕️ 왜냐하면 갈수록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를 한 마디로 딱 말하기가 어렵거든요. 저는 언어가 전공이라 통번역이나 과외 같은 일도 하고 있고요. 디자인 등 시각예술에 워낙 관심이 많기 때문에 관련 일들도 조금씩 하고 있어요. 영화도 좋아하고,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좀 불리고 싶은 건 "작가"일 것 같은데 이게 글을 쓰는 작가의 개념이기도 하고 "작가주의"를 의미하는 작가랄까요!

에디터: 요즘엔 많은 분들이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살잖아요. 반드시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본인을 소개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등학교 마치고 유학을 다녀오셨고 서울에서 쭉 사시다가 다시 광주로 돌아오셨다고요.

선화님: 사실 뭔가를 제대로 적극적으로 해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예술을 하고 싶어서 예술학교로 다시 입시도 준비해 봤고 디자인 공부도 해봤고 여러 시도들을 했지만 잘 풀리지가 않았어요. 프랑스나 미국으로 유학을 다시 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제가 숙대 입구랑 서울역 사이에 있는 청파동이라는 곳에서 6년 정도 살았는데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들이 계속되던 20대 후반 무렵 동네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인상 깊은 포스터를 하나 발견했어요. 독립출판 오프닝 같은 행사의 포스터였는데 우리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포스터가 굉장히 세련된 거예요. 그 포스터를 보고 찾아간 행사에서 만난 분들과 인연이 되어 함께 글도 읽고 공간도 찾아다니고 하다가 "뭔가 재미있는 일 없을까?" 하며 조금씩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를 하기 시작했어요.

에디터: 그때 하셨던 기획들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선화님: 낭독회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 시를 썼어요. 구독자들에게 후원금을 받고 메일링으로 시를 발행했는데요. 4명이 작가로 참여했고 한 명 당 한 달에 두 편씩, 그러니까 독자들은 한 달에 약 8편 정도의 시를 받아볼 수 있었죠. 1년 정도 진행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 글을 엮어서 나중엔 "동인 알몸"의 < 사색 >이라는 책도 만들고 꽤 즐거운 프로젝트였죠. 


에디터: "살롱 능소화"라는 공간도 운영하셨다고 들었어요!


선화님 : 맞아요. 커뮤니티 카페 같은 살롱도 운영했었죠.  회화하는 사람, 디자인하는 사람, 의상 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 기획하는 사람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근데 뭔가 거기서도 저는 정체성이 모호한 거예요. 예술가와 일반인 사이에서, 그 왜 연예인과 일반인의 경계에 있는 사람을 "연반인"이라고 하잖아요. 기획을 하는 사람들은 제가 너무 예술가 같다고 하고, 예술하는 사람들한테는 뭔가 좀 시시하게 보이는 것 같고, 그렇다고 내가 활동가인가? 생각해도 잘 모르겠고... 그 과정 속에서 항상 고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생각해 보면 저는 항상 그랬어요. 헤매는 사람이랄까. 기본이 그런 것 같아요. 이제는 살짝 해탈을 해서 그게 제 아이덴티티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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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기린"이라는 닉네임을 쓰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름의 뜻도 궁금한데요!

선화님: 사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그냥 동물 기린을 닮아서 별명이 붙여진 것도 있어요. 그리고 "기린아(麒麟兒)"라는 말이 있잖아요. 재주가 좋고 장래가 밝은 그런 사람을 뜻하는 말이에요. 사람들이 "기린아~"하고 부르면 뭔가 장래가 밝아 보이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지금 나는 정체되어 있지만 언젠가 잘될 것 같은 자신감도 막연한 기대도 생기고. 김기린 시인도 있고, 기린이라는 동물이 가진 신비로운 이미지도 마음에 들고 기억하기도 더 쉽고요! 여러 의미가 있어요. 실제로 개명을 할 계획도 가지고 있는데 내가 나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지어준 이름이라서 엄마도 찬성하셨어요.   

에디터: 앞서 본인을 "헤매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름에도 정말 여러가지 뜻이 있네요. "기린님"다워요! 이번에 광주시립미술관의 청년예술센터에 레지던시 작가로도 입주를 하셨는데 어떤 작업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선화님: 광주에 와서 조금 숨 고르기를 하다가, 얼마 전에 8명의 친구들과 함께 여성지향 섹스토이샵인 "세컨드웨이"에서 여성의 성을 주제로 한 < 토이조이웨이 >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예전에 "동인 알몸"에서 보여줬던 시를 쓰는 작업과 달리 공동작업을 하니까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배우는 것도 많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주로 저의 내밀한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를 밖으로 드러내는 일들을 해왔는데 저의 이런 감각들을 이번에는 사회적인 문제,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재앙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는 아직 고민하고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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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서울에 계실 때 이태원에서 꽤 오래 일하셨다고 들었어요. 이태원 참사소식을 듣고 느낀 충격이 남들보다 좀 더 크셨을 것 같아요.

선화님: 얼마 전에 남자친구와 진도에 갈 일이 있어서 팽목항에 다녀왔어요. 남자친구는 물리적 거리로도 그렇지만 심적으로도 세월호 참사에 가까운 거리감을 가지고 있어요. 사고 당시에도 목포에 있었는데 바로 팽목항에 갔었대요. 현장에서 직접 본모습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과 너무 달라서 괴리감과 불신이 커졌다고 하더라고요. 행정의 처리도 그렇고요. 저는 사실 세월호 참사 당시도 그렇고 어떤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이게 내 일이 아닌데 마치 내 일처럼 고통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들에 잘 공감이 안 됐어요. 그런데 이태원 참사 이후 알겠더라고요. 

제가 이태원에서 2-3년 정도 일했었고 그 골목을 실제로 너무 많이 왔다 갔다 했어요. 경험한 할로윈만 5~6번은 되니까요. 이태원의 할로윈 축제가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죠. 밤 10시쯤 되니까 그날 SNS에 이상한 영상들이 올라오더라고요. 뉴스에서는 아무 소식이 안 뜨는데 날 것 그대로인 현장 소식들이 계속 올라왔어요. 새벽까지 잠을 못 잤죠. 막대한 이미지들과 정보들이 쏟아지는데 너무나 혼란스럽더라고요. 그 와중에 이건 국가적 참사가 아니라 사고라며 브리핑이 나오고 총리가 기자들 앞에서 농담을 던지고 그런 모습을 보니 기가 찼어요. 

에디터: 이태원 참사 때는 세월호 때와 다르게 "이태원"이라는 공간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들이 정말 아프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언제든 나한테 일어날 수 있는 참사였는데도요. 

선화님: 제가 그때 당시 광주에 내려와서 잠시 나주의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농장의 아주머니들이 이태원의 문화를 잘 모르시니까 너무 쉽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서양 명절 챙기느라 그랬다, 술 먹고 늦게까지 나가서 놀다 죽었다, 마약 한 애들 아니냐 라면서요. 제가 그래서 이모들이랑 목에 핏대 높여 싸우면서 다 정정해 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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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함께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 분들도 이번 5월 전야제에 오셨어요. 많은 분들이 광주가 국가적 참사를 경험한 이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 수 있는 도시라고 말씀하세요. 누군가는 오지랖이 넓은 도시라고도 했지요. 광주를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온 선화님이 보시기에 광주는 어떤 도시인가요? 

선화님: 제가 오지랖이 넓지 않기 때문에 예전에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들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왜냐면 오지랖 없는 사람들만 있으면 누가 이렇게 헤집어서 "이것 좀 같이 해보자!" 하겠어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있는 거고 저 역시 저 같은 사람의 역할이 있는 것이겠죠. 광주는 이미 그런 아픔을 겪어버린 도시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묻어버리고 없는 것처럼 이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디터: 이태원 참사가 선화님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이번에 망월동 국립묘지도 다녀오셨다고 하셨죠?

선화님: 저도 고등학교까지 정규교육을 광주에서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5·18을 수없이 접하며 자라왔어요. 지금 떠올려보면 어릴 때 5·18 관련 무슨 합창단 같은 것도 했던 것 같아요. 다만 그때는 그냥 의미 없이 공공의 행사에 불려다녔던 거죠. 내가 무엇을 느껴야하는지도 모르고요. 오월이면 그냥 수행평가를 위해 하는 것이랄까. 인터넷을 하기 전까지는 다른 지역에서 5·18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몰랐어요.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 살다보니 생각보다 5·18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 택시운전사 > 같은 영화가 개인적으로는 너무 신파영화 같아서 마음엔 안들지만 대중들에게 관심을 갖게하고, 감동을 주는 면에서 그런 영화들도 반드시 필요하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이번에 기회가 있어서 국립묘지에 5·18 참배를 하러 간 일이 있었는데 새삼 느낀 점이, 한 번도 내가 5·18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볼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고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그 거리감을 좁히는 데 좀 오래 걸렸던 것 같은데...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들이 이제는 조금씩 생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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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광주에서 활동하시는 작가분들은 언제가 한 번은 오월의 이야기를 다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이 생긴다고도 하시던데요. 선화님도 그런가요?

선화님: 국립묘지에서 만났던 해설사님이 무덤을 하나하나 설명하시면서 사람들의 이름,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런 것들을 들으니 조금은 다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이태원 참사와 마찬가지로요. 다시 생각해보고 싶고, 내가 몰랐던 것들이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싫거든요. 언젠가 다뤄보고 싶긴 하지만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아직은 제가 광주를 소화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것 같아요. 

에디터: 앞으로 광주에서 해보고 싶은 활동이 있으시다면요?

선화님: 많죠. 저보고 카페를 차려보라 하시는 분들도 있고, 제가 사진을 또 좋아해서 사진 공방을 해보라는 사람도 있어요. 차(茶)도 좋아하고요. 제가 또 요즘에는 손으로 하는 게 재미있어서 코바늘 뜨는 그런 것도 관심 있어요. 목가적인 삶에 대한 로망도 있어서 전원생활도 꿈꾸고요. 뭔가 제대로 하는 것은 없을지 모르지만 다 조금씩 담가져 있는, 결국 헤매는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게 되려나요! 살롱 능소화의 2.0 버전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헤매도 괜찮은 사람이 더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왕 헤매는 거 더 즐겁게 헤맬 수 있도록 즐거운 일들을 더 많이 해보고 싶어요. 레베카 솔닛의 < 길 잃기 안내서 >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를 더 적극적으로 잃고 현재를 온전히 감각하며 미지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두려고요. 아마도 다채롭게 헤매는 여정을 글과 영상 이미지 등으로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까 싶네요!😊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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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님이 더 궁금하신분이라면.


인터뷰 진행일: 2024년 8월 5일
에디터: 김꽃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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