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18기념재단에서 참여한 자원활동을 시작으로 "활동가"의 정체성을 유지한지 벌써 11년차! 활동가 김유빈님은 광주가 언제나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도시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활동가의 삶을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보다 "부끄럽지 않기"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들이라고 소개하는데요.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낼 수 있는 만큼의 용기로 실천한 한걸음, 함께 걷는 동료들이 있어 버텼던 한걸음, 그 작은 걸음들이 쌓여 만들어진 변화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활동가로 살아온 지난 11년
안녕하세요. 광주에서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는 김유빈입니다. 매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다가 오늘 제 이야기를 하려니 조금 떨리네요. 저는 지역에서 활동을 11년 정도 하고 있어요. 시작은 5·18기념재단에서 참여하게된 자원봉사활동과 인턴 때문이었는데요. 처음부터 5·18을 주제로 내가 뭔가 해보겠다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휴학을 앞두고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게 된 모집포스터 때문이었죠.
당시에는 재단이 각국의 NGO단체들과 함께 진행하는 해외 인턴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거기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기회가 생겼고 태국이랑 캄보디아에서 1년 정도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광주에 복귀해 광주여성단체연합에서 인턴을 했고 이후에는 광주여성민우회에서 활동가로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성폭력피해생존자쉼터 다솜누리라는 곳에서 주로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2020년부터 지금까지는 (사)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에서 활동가이자 연구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자부심이라면 2013년부터 지금까지 단 2달만 쉬고 꾸준히 일을 해왔다는 것이에요!😄 11년 동안 딱 2달 쉬다니 정말 열심히 살았네요...!
활동가 김유빈님이 일하는 사무실 책상 모습 (사진제공 : 김유빈)
부끄러움을 마주한 순간들
5·18기념재단에서 다녀온 해외인턴 사례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실 이 경험이 없었으면 저는 지금까지 이런 활동들을 하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저는 스스로를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면에서 감정을 먼저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죠. 그런 저에게 던져진 수많은 "부끄러움"들이 활동가로서 삶을 살게 한 것 같아요.
제가 인턴으로 태국에 갔을 때 일하게 된 NGO단체가 미얀마 이주 노동자들을 돕는 단체였어요. 지도를 보면 태국의 위쪽으로는 미얀마, 아래쪽으로는 캄보디아가 있는데요. 이 세나라 중에서 태국이 잘 사는 나라잖아요. 그래서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에서 이주해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물론 불법적인 방법으로 오신 분들도 많죠. 당시에는 이 국경을 넘는 것이 너무 쉬웠어요. 저도 여권을 안 찍고 국경을 넘었으니까요. 국제 미아가 될수도 있는데 정말 겁도 없었죠.
그곳에 있으면 여러 사례를 듣게 되는데, 어느 날은 미얀마 이주 노동자들이 오징어를 싣는 탑차에 숨어 배를 타고 국경을 넘으려다가 20명이 그대로 질식사하는 사례가 있었어요. 지금 다시 말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아요. 또 캄보디아에 있을 때도 한 노동자분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국경을 넘으려고 배를 탔는데 육지를 1년이나 밟지 못했대요.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그냥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정말 기적적으로 인도네시아 해안으로 떠내려가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뛰어들 때 그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이미 죽음을 각오하셨을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남일 같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2014년에 한국에서도 인도네시아 이주민 선원이 배 위에서 폭력으로 돌아가신 일이 있었어요. 미얀마 활동가분들이 당시 저에게 이 일을 묻더라고요.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혹시 아냐고요. 그때 제가 굳어가지고 정말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남일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내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한 순간, 그것이 너무 큰 부끄러움으로 다가온 거죠.
부끄러움을 목격한 수많은 순간들이
차별에 대한 관심을 갖게하다
캄보디아에 갔을 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혈혈단신으로 갔었어요. 한 8개월 정도 정말 한국인을 못 만났거든요. 그럼에도 제가 1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서 저를 챙겨준 커뮤니티 덕분인 것 같아요. 캄보디아에서도 미얀마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저에게는 언니들이었죠. "모니라"라는 언니가 있었는데 캄보디아 사람이에요. 퇴근하면 항상 밥도 사주고 명절에 자기 집도 데려가주고 했던 언니인데 어느 날은 자기 친구가 캄보디아에 사업차 온 한국인 남성을 만났는데 결혼을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물론 그 언니가 저한테 그걸 물어본 이유가 따로 있었어요. 대충 예상이 되시지요? 정말 부끄러웠어요.
또 캄보디아에서 북한 식당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길 갔더니 저희 아빠뻘 되는 한국 남성분들이 10대 정도 돼보이는 캄보디아 여성들을 한 명씩 동행해서 와요. 참고로 한국 남성들을 모두 일반화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이 북한식당의 종업원에게 자기가 캄보디아 부유층들이 많이 가는 휴양지에 별장이 있다고 막 자랑을 하시더라고요. 식당의 젊은 종업원 여성분이 "정말요? 저도 데려가주세요~!"라고 말하며 웃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해요. 저 사람들은 밥을 먹으러 온 거야 뭘하러 온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죠. 정말 부끄러움의 연속이었어요.
저는 원래 전공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경제적인 사정도 있었지만, 한국에 돌아오니 타국에서 받았던 언니들의 그 따뜻한 친절을 오히려 나보다 힘든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죠. 이방인을 향해 조건 없이 베풀어줬던 그들의 다정함을 나도 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활동가로서 삶을 시작했고 지금도 이렇게 살아오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몇 가지 주목하는 의제들이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차별에 대한 것입니다. 전주에 선미촌이라는 곳을 들어보셨나요? 예전 성매매 집결지인데요. 전주에서는 이곳을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유지보존 하고 있어요. 답사를 간 적이 있는데 정말 저는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요.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는데 정말 미로예요. 문이 굉장히 많은데, 말하자면 예전에 경찰이 뜬다! 하면 어느 방향이든 도망 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거죠.
군산의 미군기지 기지촌 아시나요? 6.25 전쟁 이후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부대 인근에 일명 "기지촌"이라는 것들이 생겼어요. 지금은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양공주"라는 따가운 시선만 남았지만 실은 국가가 미군들을 상대로 만든 성매매촌이거든요. 저희가 갔을 때는 철거 중이었어요. 그때 미군들이 한국여성들에게 행했던 수많은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있어요. 성병에 걸린 여성들을 모아두고 거길 "몽키하우스"라고 불렀어요. 여성들에게 페니실린을 과도하게 주사해서 죽게 만들기도 했죠. 피해 여성들은 양공주라는 시선 때문에 여전히 나설 수가 없어요. 지금 국가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성들의 공간을 빠르게 철거해 나가고 있죠.
도서 < 포스트 5·18 > (사진제공 : 김유빈)
오월을 새롭게 이야기하는 활동들
2021년에는 지금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 여러 단체와 협업해 "박용준 투사회보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저희 회원분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것인데요. 1980년 5월 당시 투사회보의 글씨를 쓰셨던 박용준 열사의 서체를 폰트로 만든 것입니다. (사)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나 5·18기념재단의 홈페이지 등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어요. 오월을 일상에서도 기억하고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기획되었죠. 실제로 정말 많은 분들이 다운을 받으셨는데요. 공중파 방송의 자막이나 신문사, 디자인 작업물의 폰트로 널리 쓰이고 있어요. 청년분들이 많이 사용하시는 디자인 플랫폼 "미리캔버스"에서도 이 서체를 만나보실 수 있어요!😎
박용준 열사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이 분이 박관현 열사와 윤상원 열사와 함께 활동하셨던 분이에요. 그런데 다들 잘 모르시죠.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박용준 열사는 고아였어서 챙겨줄 사람이 없다고요. 저는 그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열사에도 위계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었나 싶었어요. 같은 활동을 했는데 어떤 목소리는 크게 전달되고 어떤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건, 광주가 다시 살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 김군 >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예요. 영화에서는 돌아가신 것으로 나왔는데 나중에 본인이라며 밝히신 분이 있었죠. 항쟁에 3~4일 정도 참여하시다가 빠지셨는데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나서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죽은 사람들도 위계가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위계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런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소개하자면 < 포스트 5·18 >이라는 도서를 함께 기획해서 만들었는데요. 1980년 5월을 직접 겪지 않은 비경험세대 10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이름도 저희가 약간 도발적으로 앞에 "포스트"를 붙였는데요. 청년의 시선에서 5·18을 이야기한 책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2쇄가 넘어갈 정도로 아직 많이 팔리진 않았는데요.🤣🤣 나중에 보니 또래 청년분들이 이 책 잘 읽었다고 많이 이야기해 주시더라고요. 그럴 땐 참 뿌듯해요!
"나의 언니들" 동료가 있기에
계속 나아갈 수 있었던, 작은 걸음
제가 "부끄러움" 때문에 이런 활동들을 시작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런데 이런 많은 활동들을 하다 보면 사실 이제 좀 덜 부끄러워야 하는데 알면 알수록 더 부끄러워져요. 제 스스로를 "활동가"로 칭하는 것도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제가 그런 칭호를 얻어도 되는가에 대한 반성을 계속해요. 어떻게 보면 자기 검열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활동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보면 저는 "불평등"이나 "불편함"을 감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감각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과연 내가 "활동가가 맞을까" 더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활동가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과정들이 너무 힘들죠. 도망치고 싶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아요. 나 아니어도 할 사람 많은데, 나까지 나서야 할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데 나는 계란도 아닌 계란 껍질인 것 같은데, 그만하고 싶다, 이런 생각도 많이 해요. 결국 그럴 때마다 다시 한 걸음 나아가게 해 준 것은 동료였던 것 같아요. 활동가들과 함께 선미촌에 갔을 때도 전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장녀이기 때문에🤣 사실 겉으로 티를 잘 안내거든요. 근데 그걸 함께 간 누군가가 눈치챈 거죠. 그분이 저한테 잠시 밖으로 나가자고 하면서 밝은 이야기를 나눠주시고 저를 보살펴주셨거든요. 활동을 하다 보면 정말 현장의 힘든 모습들을 목격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상황에 너무 몰입해서 빠져들지 않도록 분리시켜 주고 힘들어지지 않게 이끌어주는 동료들, 특히 언니들이 있어요.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항상 고맙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활동을 하면서 "나를 챙기자"라고 앞으로는 더 많이 생각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