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5·18민주화운동 44주년 전야제 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간 지인에게 "올해 조선대가 5월에 축제를 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웠는데, 언론을 살펴보니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5월의 광주에서 대학 축제가 열리는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광주의 대학들은 지난 수십 년간 5월에 '축제'를 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광주에게 5월이란 그런 계절이었다. 이번 조선대 축제는 뉴진스로 시작해서 싸이로 끝났다. 27일에 뉴진스가 왔고, 29일에 싸이가 왔다.
학내에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이번 축제를 위해 조선대 총학생회 측은 축제 계획에 앞서 오월 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양해를 구했다. 축제 때 판매되는 총학 굿즈 수익금 일부를 5·18기념재단에 출연하기로 했고, 5·18유족회장에게 축제에 와줄 것을 요청하며 그를 정식으로 초청했다. 다행히 유족회장은 학생들의 초청에 응했다. 축제장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다.
여기까지 듣고, 나는 그래도 이번 축제가 갈등 없이 진행된 줄로 알았다. 그러나 후속 보도를 보니 그렇지 않았다. 축제에 참석하기로 한 5·18유족회장은 "이번 축제가 5·18에 대한 추모의 의미를 갖는 행사라고 생각해 참석하려고 했지만 추모의 의미가 없는 단순 축제라는 점에서 참석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의견인가, 검열인가..."민주광장을 둘러싼 논란들"
일부 오월 단체 관계자들은 조선대에 항의 방문했다. 이에 조선대 측은 "내년부터 5월에 대동제를 개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조대 총학 측이 기부를 언급했던 5·18기념재단은 조선대에 축제와 관련된 자리에서 자신들을 언급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그들은 "축제가 시작되는 27일이 어떤 날인가를 조선대 구성원들이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며 총학 측의 기부 제의를 거부했다.
언제부터인가 광주에서는 이와 같은 일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곤 했다.
지난 2016년에 광주 금남로에서 제3회 광주 물총축제가 열리자, 금남로에서 '총질'을 연상하는 행위가 재현돼 불편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이듬해 행사는 '물꽃놀이'라는 다소 생경한 이름으로 진행됐고, 아이들의 장난감인 물총은 치워졌다.
2018년에 제1회 광주퀴어문화축제가 금남로에서 열리자 "민주성지인 5·18민주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를 하는 데 반대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반대자들은 "그동안 진행된 다른 퀴어축제들이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와 성적으로 문란한 물건들을 전시, 판매하는 행태를 보여 옴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법적, 도적적 논란을 야기했다"고 했다.
대체 언제부터 민주주의와 축제가 이렇게까지 무관한 것으로 취급됐는지 의문스럽다. 5·18기념재단은 조선대 학생들을 향해 "5월 27일이 어떤 날인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훈계했으나, 그날의 진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5월 27일, 문득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광주시민들의 최후 항전으로부터 벌써 44년이 흘렀음에 대해, 그 진정한 의미에 생각해 봤다. 어느새 그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날이 됐다.
민주주의와 축제, 같이 가지 않을 길 없다
1980년 5월 27일, 광주의 시민들은 대체 왜 죽음의 도청을 목숨을 걸고 지켰을까? 나는 그것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오늘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억하는 수많은 타자들이 내일의 어느 날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곳은 믿음의 광장이었다. 한국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길에 학생들의 축제나 성소수자와 같은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가 빠질 수 없다는 점에서, 광주의 정신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오늘의 광장에는 타자의 행위를 재단하고 추모의 올바름을 논하는 도덕 경찰들만 난무한 실정이다.
올해로 5·18기념재단은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5·18 마지막 수배자였던 윤한봉이 쓴 재단 창립선언문의 문장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5월은 광주의 것도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의 것도 아니고 조국의 것이고 전체 시민과 민족의 것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5월이 광주의 5월로 올바로 서야 진정한 전국화, 세계화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선언문 말미에서 5·18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19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다면서 가신 임들이 환하게 웃고 계신다고 했다.
5월의 정신을 미래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
대학에서 축제가 열리는 5월의 광주라니, 여러모로 복잡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기뻤다. 윤한봉이 말했던 것처럼 가신 임들이 환하게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조대 축제에서 신나게 놀 사람들은 분명 지난 전야제에 참석한 사람들보다 많을 것 같은데 그게 오월이 만든 자유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5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뉴진스가 온 5월 27일의 조선대에 모였다.
5월의 정신은 미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형태가 우리의 상상과 다를지라도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5·18 추모 부스가 위치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된 이번 축제 역시 그날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아주 많은 곳에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월의 이야기를 듣고 오월의 정신을 보게 될 것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의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이정연 열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아무것도 헛됨은 없어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 괴로움 당했던 것 아무것도 헛됨은 없어라."
그날의 일은 아무것도 헛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사랑은 여전히 광주 곳곳에서,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다.